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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영웅들

작가윌 듀란트출판김영사발매2011.09.14


Chapter 18 - 종교 개혁 1 :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

로마 가톨릭교회는 역사상 가장 특기할 만한 조직 가운데 하나다. 그 기원, 목적, 방법, 흥망성쇠, 잘못, 업적 등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면 다른 어떤 주제나 제도의 연구보다 인간의 본성과 가능성에 대해 많은 빛을 던져줄 것이다. - 395p

위클리프는 교황이야말로 사도 요한이 예고한 반反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묵시록의 짐승이라고 했다. 이런 약점을 고칠 방안으로는 모든 재물과 권리를 교회로부터 빼앗고, 사제들에게는 사도의 빈곤 속에 살라고 제안했다. - 401p

교육과 배움의 확장, 고전 문화의 발굴, 차츰 커지는 대학의 독립과 세속화, 십자군 전쟁에서 회교도가 승리함으로써 기독교 내부의 회의주의에 토대가 마련된 점,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모르는 사이에 이성이 풀려난 것, 둔스 스코투스와 오컴의 대담한 회의론, 모든 계층에서 일어난 육체의 해방, 경건하던 농경 사회가 도시 노동자와 여행을 많이 한 상인들과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이 빠른 금융업자들의 종교적 무관심으로 이행되었다는 점, 왕과 국가의 부가 늘어나고 군대가 강해졌다는 사실, 추기경과 수도사들의 세속적 욕망, 교황청의 분열...... 이런 것들이 또 다른 발전들과 어우러져 한때 당당하던 가톨릭, 곧 '보편' 교회라는 당당한 건축물을 붕괴시키려 위협하고 있었다. - 406p

1510년 로마를 방문한 루터는 그 화려함에 압도되었고, 로마의 도덕성에 대해 기록에 남은 어떤 비판도 하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뒷날의 회상에서는 1510년의 로마가 '혐오'스러웠다고 서술했다. 교황들은 세속의 황제들보다 더 나쁘고, 교황청에서 "열두 명의 벌거벗은 소녀들"이 저녁 식사 시중을 든다고 했다. - 412p

종교 개혁가 및 인문주의자들의 판단도 비슷한 것이었지만, 그(에라스무스)는 진짜 기독교의 정수인 신약 성서가 독단과 세월에 의해 어두워지고 가려졌다고 보았다. - 414p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가마의 여행, 그리고 터키가 에게 해를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 막시밀리안 황제가 베네치아와 벌인 전쟁 등이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교역을 방해했다. 독일 부역은 점점 더 발트 해와 북해와 대서양으로 통하는 큰 강들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략) 독일 상업과 돈이 북부로 옮겨가면서 북부 독일은 이탈리아 경제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황제와 교황에 맞서 루터를 보호할 정도로 충분히 강해졌다. 부분적으로는 반대의 이유에서 남부 독일은 가톨릭으로 남았다. - 423~424p

일반적인 적대감이 너무나 커서 스페인에서 생겨난 종교 재판은, 독일에서는 거의 아무에게도 파문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폭력적인 팸플릿은 독일 교회보다 로마 교황청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일부 수도사들과 사제들도 이런 공격에 동참해 고위 성직자의 사치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곤 했다. - 426p

Chapter 19 - 종교 개혁 2 : 루터와 공산주의자들

레오 10세가 발행한 면제 칙령은 교황 율리오 2세가 시작했지만 전쟁의 황홀경에 잠겨 거의 잊고 있던,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완공할 경비를 걷기 위한 것이었다. - 430p

코페르니쿠스와 콜럼버스를 제외한 다른 누구보다도 이후의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이 사람(루터)은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 432p

하느님에 의해 구원을 받도록 선택된다는 것, 그리고 개인의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세운 공덕의 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루터 신학과 그 추종자들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 434p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민족주의에 호소할 만큼 성숙해 있었다. 지도에 독일이라는 나라는 없었지만 독일 사람들은 있었고,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후스가 보헤미아 애국주의에 호소하고, 헨리 8세가 가톨릭 교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 대한 교황의 권력을 거부했던 것처럼, 루터도 반란의 기치를 신학의 사막에 꽂지 않고 독일 민족정신이라는 풍요로운 토양에 꽂았다. 개신교가 승리한 곳에서는 어디서든 민족주의가 깃발을 흔들었다. - 440~441p

12월 11일, 루터는 교황의 통치를 부인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수도사가 교황을 파문한 것이다. - 442p

1528년 새로운 이단에 대해 관대하라고 권고했던 루터는, 1530년에는 이들은 '허풍선이'이며 혁명가라 보고, 그들에 대해 "칼을 사용"하라고 권고 했다. - 464p

가톨릭 교도들이 그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킨 것이라고 비난하자, 그(에라스무스)는 동의했다. "그래요. 하지만 내가 낳은 알은 암탉이었는데, 루터가 부화시킨 것은 싸움닭이었단 말이오." - 467p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카를 5세는 독일 선제후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제후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선택할 권한을 가졌다.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종교는 시민들에게는 의무였다. (중략) 그러나 불만을 가진 사람은 한 국가의 공식 종교가 자신의 종교에 잘 들어맞는 제후국으로 이주할 자유를 얻었다. - 468p

CHapter 20 - 가톨릭 종교 개혁

이탈리아 예술가와 학자들은 가톨릭에서 개종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가톨릭 자체를 학문과 예술로 개종시켰기 때문이다. - 470p

내부 개혁 운동은 카라파가 교황 바오로 4세가 되면서(1555) 승리를 거두었다. (중략) 이탈리아에서 (이탈리를 넘어서는 덜 활발하게) 교회는 성직자들과 그 도덕성을 개혁했다. 원래의 교리는 일부러 건드리지 않은 채 이루어진 일이었다. - 472~473p

테레사는 쉰여덟 살이 되던 해에 카르멜 수도회를 개혁하기로 결심했다. (중략) 테레사의 규칙은 명랑하고 단호하게 사랑하는 것이었다. 수녀원은 속세를 향해 닫혔다. - 475p

파사우 조약(8월 2일)을 통해 독일의 페르디난트 왕은 군사적으로 승리한 개신교 측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개신교는 공의회에 더이상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게 되었다. - 487p

공의회는 루터의 반란을 점화시킨 잘못된 악습들을 인정했다. (중략) 가톨릭 종교 개혁 혹은 반종교 개혁은 주요 목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가톨릭 국가나 개신교 국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계속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처녀를 유혹하고, 직위를 팔고,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성직 계층의 도덕성은 개선되었다. - 488p

Chapter 21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은 르네상스(셰익스피어), 종교 개혁(엘리자베스), 계몽주의(베이컨)가 하나로 합쳐져 천재와 역사가 폭발적으로 집약된 시대였다. - 491p

영어권 세계의 모든 식자들은 셰익스피어가 쓴 37개의 희곡 모두 혹은 일부에 들어 있는 주제와 기쁨에 친숙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희곡 작품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잔혹한 냉소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놀라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 문체의행복한 화려함 한가운데로 거의 냉소적인 고통의 외침이 터져나온다. - 494p

영국은 그녀(엘리자베스)를 사랑하기를 중단했다. 영국은 그녀가 너무 오래 살았으며, 이제 젊은 왕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의원들은 그녀가 의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청교도를 박해하는 것, 총신들에게 독점권을 선물하는 것 등에 대해 전보다 더욱 더 격렬하게 반발했다. 놀랍게도 여왕은 마지막 순간에 양보하고 이런 남용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하원 의원들이 그녀에게 감사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녀가 그들에게 마지막 연설로 알려진 연설을 하는 동안, 그들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황금의 연설'이었다.(1601년 11월 30일) - 506p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인이나 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격한 기질과 정열을 지닌 여성으로서 삶을 사랑했다. (중략) 그녀의 통치의 지혜는 부분적으론 측근들의 지혜였다. 그녀의 우유부단함은 변하는 기회 때문이었지만, 자주 행운으로 판명되었다. 떄로는 이런 우유부단함이 정책상의 약점이 되어 적들의 내분으로 인해 살아남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성공적으로 살아남았고, 공정한 수단으로, 혹은 정직하지 않은 수단으로 번영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지치고 보잘것없는 영국(잉글랜드)을 물려받았지만 그녀가 떠날 때 영국은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 508p

오늘날 지식과 전문 분야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헐떡이는 우리들 눈에, 베이컨의 프로그램은 거창하고 공허해 보인다. 그러나 당시 학문은 아직 그토록 광범위하고 세분화되어 있지 않았다. - 515p

베이컨은 가설에 대해 매우 조심했다. 이것들은 전통이나 선입견 혹은 소망 즉 '우상'에 의해 너무 자주 제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식적이건 아니건, 가설이 경험에서 확정된 자료를 뽑아내 그것에 광택을 내거나, 아니면 반대 증명을 무시하는 경우에는 철저히 불신했다. - 518p

"한 국가의 청년기에는 군대가 번성한다. 한 국가의 중년기에는 학문이 번성한다. 그리고 군대와 학문이 잠시 함께 번성한다. 국가가 쇠퇴하는 시기에는 상술과 상인들이 번성한다." (중략) "무엇보다도 좋은 정책이란 국가의 재물과 돈이 소수의 손길에 모이지 않게 하는 일이다." - 522~523p

영국인들이 '자연 지식의 증진을 위한 왕립 협회(학술원)'를 세웠을 때(1660), 그에 대한 영감을 준 사람으로 프랜시스 베이컨이 꼽혔다. 그리고 <뉴 아틀란티스>의 솔로몬 의회가 그 목표였다. 라이프니츠는 베이컨이야말로 철학을 재생시킨 사람이라고 환호성을 올렸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함께 모여 <백과사전>(1751)을 썼을 때, 그들은 이 책을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헌정했다. (중략) 홉스에서 스펜서에 이르는 영국 사상의 진로와 사유는, 버클리와 흄과 영국 헤겔파를 제외하면 베이컨의 노선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이성의 시대 맨 앞에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5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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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틈에 (문화 칼럼니스트)

책을 통해 타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서른신입생 // 보편적인 절대 진리는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이라는 사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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